[허지원의 마음 상담소] 원치 않은 사건이 벌어지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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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은 어떤 사건이 벌어지던 날. 힘들겠지만, 그날을 잠시 떠올려 보세요.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하루 중 어느 때였고, 어디에서 그 일이 일어났나요? 그때의 순간들은 손쓸 사이도 없이 고통스러운 감정과 뒤엉켜 우리 뇌 아주 깊은 곳에 저장됩니다. 그 기억들은 조금씩 오염되어 어딘가 부정확하지만, 너무나 생생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이를 섬광기억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이 기억은 어느 때고 우리를 그 시간, 그 장소로 느닷없이 데려다 놓습니다. 매번 후회는 깊고 마음은 혼란스럽습니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더라면 어땠을까’ 하며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곱씹습니다.

이제 잠시, 그 섬광 기억이 만들어지기 10초 전으로 가 볼까요. 나의 생을 뒤흔들 일이 일어날 줄은 조금도 모르던 그때로요. 네, 그 지점에 잠시만 머물러 계셔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전 1%도 이해할 수 없는 양자역학적 가설에 따르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도 바로 그때 탄생합니다. 여러 갈래의 ‘평행 우주’가 시작되는 분기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한 우주가, 내가 피해자가 아닌 우주가 여기 아닌 어딘가에 있습니다. 나와 가족 모두가 간절히 바라던 그 소원이 이루어진 우주, 내가 지금처럼 아프지 않은 우주, 사랑하는 사람이 여전히 내 곁에 있는 우주. 여전히 생생한 그날로부터 가지를 뻗어, 이곳의 나와는 영영 닿을 수 없이 평행하게 달려가는 우주가 (가설적으로) 존재합니다.
다만 내가 바라던 완벽한 우주, 적어도 이보다는 난도가 낮은 우주는 이미 그 분기점에서 다른 시간선을 타고 달려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절망하세요. 나의 세계에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무용한 생각과 행동들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섬광 기억이 나를 몇천, 몇만 번이고 다시 그 분기점으로 데려간다 해도, 돌아갈 수도 없고 도망칠 곳도 우리에겐 없으니 우린 다시 이 우주에 서게 될 거예요.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겁니다.
폐허에 있더라도, 다시 살고 싶지 않은 우주라 해도, 내가 감당해야 할 나의 생입니다. 이때 나의 우주를 미화하거나 낙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새로운 행동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리두기’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기억과 감정들에 거리를 두어야, 내가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깁니다. 이에 제가 최근 자주 사용하는 기법 두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섬광기억이 여전히 나를 얼어붙게 한다면 지금은 힘들 수 있으니 두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첫째, 나의 생을 영화라 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떠올려 보세요. 제 경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만 관객이 드는 해피엔딩 대작 쪽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안개 가득한 모호한 결말로 쓸쓸하게 흘러가는 독립영화 쪽일 겁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면, 매일 어떻게든 다정하게 자신을 구원하려 했고, 남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웃어 보였고, 매일 조금씩 (그게 무엇이든) 더 사랑하려 했다면, 겸연쩍게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고 있으려니 좀 쓸쓸하긴 해도, 제법 멋이 있네.’
이번 생에 우리에게 주어진 전개는 이것이었습니다. 바랐던 모습은 아니지만, 어느 구간은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어지지만, 그렇게나 쓸쓸해도 결국 운치가 있는 독립영화. 그렇게 때로는 나를 멀리서 바라보며, 떠나간 것을 애도하고, 다시 기준점을 잡고, 지금 내가 해야 할 행동들에 몰입합니다.
나의 평안한 평행우주들을 떠올리는 것이 두 번째 기법입니다. 여기와는 다른 나의 완벽한 우주가 어딘가 ‘있다고 치면’, 그 존재만으로 느껴지는 지극한 안도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뭐, 여기에서는 한 번 이 난이도로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에게 이야기하세요. ‘어딘가엔 다른 선택을 한 우주가 펼쳐지겠지, 어딘가에는 우리가 함께하는 우주도 있겠지. 그걸로 됐어. 이 우주에서의 삶은 이제 내가 감당할게. 나의 우주이니까 이곳을 외롭게 두지는 않을 거야.’ 그날의 분기점에서 뻗어 나온 우주가 다시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합니다. 이 우주를 이대로 끝장내지는 않을 겁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하루 중 어느 때였고, 어디에서 그 일이 일어났나요? 그때의 순간들은 손쓸 사이도 없이 고통스러운 감정과 뒤엉켜 우리 뇌 아주 깊은 곳에 저장됩니다. 그 기억들은 조금씩 오염되어 어딘가 부정확하지만, 너무나 생생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이를 섬광기억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이 기억은 어느 때고 우리를 그 시간, 그 장소로 느닷없이 데려다 놓습니다. 매번 후회는 깊고 마음은 혼란스럽습니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더라면 어땠을까’ 하며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곱씹습니다.

이제 잠시, 그 섬광 기억이 만들어지기 10초 전으로 가 볼까요. 나의 생을 뒤흔들 일이 일어날 줄은 조금도 모르던 그때로요. 네, 그 지점에 잠시만 머물러 계셔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전 1%도 이해할 수 없는 양자역학적 가설에 따르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도 바로 그때 탄생합니다. 여러 갈래의 ‘평행 우주’가 시작되는 분기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한 우주가, 내가 피해자가 아닌 우주가 여기 아닌 어딘가에 있습니다. 나와 가족 모두가 간절히 바라던 그 소원이 이루어진 우주, 내가 지금처럼 아프지 않은 우주, 사랑하는 사람이 여전히 내 곁에 있는 우주. 여전히 생생한 그날로부터 가지를 뻗어, 이곳의 나와는 영영 닿을 수 없이 평행하게 달려가는 우주가 (가설적으로) 존재합니다.
다만 내가 바라던 완벽한 우주, 적어도 이보다는 난도가 낮은 우주는 이미 그 분기점에서 다른 시간선을 타고 달려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절망하세요. 나의 세계에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무용한 생각과 행동들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섬광 기억이 나를 몇천, 몇만 번이고 다시 그 분기점으로 데려간다 해도, 돌아갈 수도 없고 도망칠 곳도 우리에겐 없으니 우린 다시 이 우주에 서게 될 거예요.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겁니다.
폐허에 있더라도, 다시 살고 싶지 않은 우주라 해도, 내가 감당해야 할 나의 생입니다. 이때 나의 우주를 미화하거나 낙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새로운 행동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리두기’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기억과 감정들에 거리를 두어야, 내가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깁니다. 이에 제가 최근 자주 사용하는 기법 두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섬광기억이 여전히 나를 얼어붙게 한다면 지금은 힘들 수 있으니 두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첫째, 나의 생을 영화라 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떠올려 보세요. 제 경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만 관객이 드는 해피엔딩 대작 쪽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안개 가득한 모호한 결말로 쓸쓸하게 흘러가는 독립영화 쪽일 겁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면, 매일 어떻게든 다정하게 자신을 구원하려 했고, 남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웃어 보였고, 매일 조금씩 (그게 무엇이든) 더 사랑하려 했다면, 겸연쩍게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고 있으려니 좀 쓸쓸하긴 해도, 제법 멋이 있네.’
이번 생에 우리에게 주어진 전개는 이것이었습니다. 바랐던 모습은 아니지만, 어느 구간은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어지지만, 그렇게나 쓸쓸해도 결국 운치가 있는 독립영화. 그렇게 때로는 나를 멀리서 바라보며, 떠나간 것을 애도하고, 다시 기준점을 잡고, 지금 내가 해야 할 행동들에 몰입합니다.
나의 평안한 평행우주들을 떠올리는 것이 두 번째 기법입니다. 여기와는 다른 나의 완벽한 우주가 어딘가 ‘있다고 치면’, 그 존재만으로 느껴지는 지극한 안도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뭐, 여기에서는 한 번 이 난이도로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에게 이야기하세요. ‘어딘가엔 다른 선택을 한 우주가 펼쳐지겠지, 어딘가에는 우리가 함께하는 우주도 있겠지. 그걸로 됐어. 이 우주에서의 삶은 이제 내가 감당할게. 나의 우주이니까 이곳을 외롭게 두지는 않을 거야.’ 그날의 분기점에서 뻗어 나온 우주가 다시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합니다. 이 우주를 이대로 끝장내지는 않을 겁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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